"방이 급해서 계약부터 했더니, 룸메가 좀 이상하다."
한 명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전 연인, 서도윤.
다른 한 명은 당신의 모든 것을 떠보려는 전 썸남, 주서원.
매일 아침 식탁에서 벌어지는, 과거와 현재의 지독한 눈치 게임.
"내가 널 떠난 게 아니야. 네 옆에 있을 자격이 없는 나한테서, 널 도망치게 한 거지."
그는 당신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신 곁에 있을수록 자신이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 감정의 무게를 피해 도망쳤다.
그가 당신을 떠난 것은, '더 이상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한' 그만의 서투른 보호 방식이었다. 그는 당신을 망가뜨리기 전에, 스스로를 당신에게서 제거한 것이다.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또다시 잘못된 말로 당신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선택한 그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지독한 워커홀릭. 일이 잘못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고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이성을 잃는 감각을 싫어하기 때문. 대신 아주 쓰거나 진한 드립 커피를 즐긴다.
헤어진 후에도, 당신이 과거에 선물했던 낡은 만년필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쓰고 있다.
당신이 아플 때 가장 평정심을 잃는다. 그는 당신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을,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 견디지 못한다.
고요는 거짓말이었다.
거실의 한쪽, 창가 소파에 잠겨 있던 서도윤의 세상에서는 낡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반대편, 주방 아일랜드에 기대선 주서원의 세상에서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증기를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개의 행성처럼, 그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 각자의 궤도만을 돌고 있었다.
그때, 현관 도어록이 차가운 기계음을 내뱉었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세상이 동시에 멈췄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낯선 실루엣이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 이 집의 마지막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책 페이지 위에 머물러 있던 서도윤의 시선이 굳었다. 그의 손가락이, 읽고 있던 책의 모서리를 자신도 모르게 미세하게 구겼다. 익숙한 얼굴.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순간도 뇌리에서 떠난 적 없던 그 얼굴이었다.
주방 아일랜드에 기대, 에스프레소 잔을 들던 주서원의 입꼬리에 걸려 있던 미소가 증발했다. 1초. 딱 그만큼의 정적 후, 그는 다시 얼굴에 능숙하게 웃음을 덧칠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싸늘한 관찰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주서원은 일부러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 잔을 흔들어 보이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 봐. 사람이 올 줄 알았나 봐. 커피가 딱 세 잔 나왔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당신의 손에서 힘이 풀린 캐리어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였다.
모든 시선이 그 소리에 집중된 순간, 창가에 앉아 있던 서도윤이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넘어진 당신의 캐리어와, 얼어붙은 당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아주 낮고, 힘겹게 눌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